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법

 

사람이 사람을 제대로 대하려면
속셈이 얄팍한 상인이 고객을 대하듯
쓸데 없이 싹싹하거나 비굴할 필요가 없고 계산을 할 필요도 별로 없다.

인색한 고용주가 직원을 대하듯
더 쥐어짜 낼 방도를 생각하거나
사람을 단지 기계가 할수 없는 일을 하는
특수한 기계로 생각할 일도 아니다.

가장 세속적인 요령은
힘 세거나 부유하거나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잘 대하고
반대로 힘 없고 가난하거나 이득을 가져다 줄 재능 없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고 ,
그저 상식적인 방법은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잘 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인가 한다.

그러나 가장 남는 방법은
가장 만나기 쉬운 사람, 바로 내 이웃에게부터 잘 해주는 것이다.
이웃은 세속적이거나 상식적으로 잘 해주어야 할 대상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반드시 불우하거나 약한 사람일 필요도 없이,
약점이 있어도 좋고, 실수를 해도 좋고, 장점이 있으면 더 좋은,
그저 살다 부딪히는 사람, 가까운 사람이다.

그것이 가장 남는 장사인 이유는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면 내가 덩다라 행복을 맛보기 때문이고
종교적 영생을 굳이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현세에서 이미 득이 되니
그것이 가장 많이 남는 장사인 탓이며
그래서 이것을 간파한 철학자도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이치의 대칭적 의미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께름칙한 빚은
나를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반대로 대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잘못하면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영영 없이 떠나게 되므로
이야 말로 굉장한 모험이다.

Mother nature, father time

“Mother nature, father time.”  자주 쓰이는 영어 표현이다. 그 정확한 유래는 모르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삶의 여건을 베풀어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시간은 한치도 어김 없는 리듬으로 우리를 채찍질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준다. 시간은 만물의 시작을 가능케 하지만 그들의 종말도 철저하게 챙기며 감정 없이 박자를 매기는 메트로놈(metronome)이다.

시간은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뛰는 사람을 긴장하게 하지만 목표의 성취가 가까와 지는 기대감을 주며 요긴하게 쓰일 삶의 밑천이 된다. 그러나 더 이상의 목표가 없거나 그것의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사람에게 삶은 죄수의 남은 형기(刑期)가 되고 시간의 형기가 만료됨을 막는 저항이 된다.

목표의 상실만큼 사람을 시간에 저항하게 하는 것은 나이가 드는 것이다. 노인은 삶의 마지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노년에 이른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시간은 항상 어두둔 그림자를 드리우는 반갑지 않은 존재인 것 같다. 많은 준비와 단련을 통해 죽음을 향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두려움에 상당한 저항력을 기른 사람에게도 때로는 엄습하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만큼 인간을 노력하게 하는 것도 없다. 장거리든 단거리든 챔피언은 결승선(finish line)에 임박하여 역주(力走: spurt)할 것이다.

최근에 어디선가 들은 말로는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니 가진 것은 현재 뿐”이며 그것은 영어로 “present”이고 그것은 곧 선물이라는 뜻으로도 통하니 현재는 내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두 present는 어원도 다른 것 같고 이런 말이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닌지 몰라도, 꽤나 뜻이 통하는 기분이 든다. 현재는 시간 중에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니 말이다. 물론 과거를 잊고 경험을 살릴 수 없고 미래를 생각 않고 목표를 세울 수 없으나, 현재에 좀 더 충실하라는 뜻으로 새긴다.

그래서 나도 말 장난을 통해 은퇴(retire)를 재정의해 본다. 그것이 자동차의 바퀴(tire)를 다시 장착하는 것, 즉 re + tire이므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계기일 수 있어도 물러나 휴식하고 동작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고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처럼 체력이나 날카로운 의식을 요구하는 일에 부적합하더라도 차근차근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자신의 쌓은 지식이나 경험을 유용하게 쓰고 흥미를 느낄 사명을 찾는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저 감가상각을 당하는 노년을 맞지 않아도 될 것이니 말이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하고 싶거나 꼭 하겠다고 벼르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 없이 잠자리에 드는 것은 생애의 가능성을 반납하는 것이고 죽음의 연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살고 싶어 한다지만 그들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일이 너무 흔하다. 오락이나 소일거리가 없으면 참지 못하면서 오래 살겠다는 것은 진정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저 죽는 것을 뒤로 미루려는 생각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 모구가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정열을 품고 살아온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흙이라야 할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simply fade away.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어느 장군의 고별사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져진 문구이나 원래는 장렬한 전사를 하지 못하고 노인이 되어 세인의 무관심 속에 사라지는 용사들의 감상적 한이라고 한다. 트로이에서 승화한 아킬레스 이래 전장에서의 죽음이 군인에게는 최대의 영광이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간신히 느낄 수 있는 정도인 것은 현대의 전사(戰死)는 영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챦은 핑게로 병역을 피한 현직 미국 대통령도 “포로가 되지 않은 사람”이 낫다는 식의 발언으로 전쟁 영웅을 비하하는 실정이니 당연하다. 현대가 추켜 세우는 용사는 전장에서 CNN과 인터뷰를 잘 해치우는 매끈한 용모와 말솜씨로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수십년 이상 위선과 허구와 얄팍한 실익의 추구에 길들여진 내 감각도 죽기보다 다만 사라져 가던 중에, 그야말로 시대착오(anachronism)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John McCain이라는 한 노병의 사라짐에 놀랍게도 그동안 마비되었던 미국인들의 감성이 잠시나마 굳은 표피를 뚫고 흐르는 중이다.

그는 사라지던 중이었다. 월남전 당시 해군 함재기의 전투 조종사로서 탑승 중이던 전투기가 두번이나 파괴되는 중 살아 남고, 5년 반의 포로 수용소와 고문과 유혹을 이겨내고 귀환한 그는 장렬한 전사를 하지 못해 영광을 놓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의 대선에 패하고 장렬한 은퇴를 하기보다 상원의원의 자리로 돌아가 힘 닿은 데까지 할 일을 하다 갔으니 정치의 전장에서도 영광을 놓친 것이다.

대선에서 그에게 패배를 안긴 Bush와 Obama가 장례식의 조사를 맡고 그가 최후로 대적했던 Trump가 대중의 압력에 시달리다 못해 백악관의 국기를 올렸다 내렸다하는 것이 마치 ‘사제갈 능주 생중달(死諸葛 能走 生中達: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아냈다)’을 실감케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대중의 반응이다.

정치의 패자가 인생의 승자로 뒤짚히는 것은 소설이나 종교 문헌에서나 보는 것으로 체념하던 나에게 이번 주간은 통쾌한 슬픔과 전율의 시간이다. 그는 마지막 투병 중 가진 인터뷰에서 스스로 많은 실수를 했다고 자인하고면서 다만 나라를 사랑했다는 점에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개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하면 내숭과 체면치례로 간주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McCain의 삶은 너무나 투명하고 직선적있던 탓에 그런 냉소적인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진정한 권위이다.

그는 자신이 다만 나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명예롭게(honorably) 봉사했다는 평판을 단지 탐내고(hopefully)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겸손은 쉰 내 나는 반찬만 씹던 사람들에게 상쾌한 샘물의 맛을 주는 신선한 것이다.  원래는 세상이 이래야 한다. 다만, 이런 것이 너무 너무 드물고 번지르한 외관과 수식어 속에 문드러진 탓에 희귀한 쇼크가 되어 버렸다.

그의 덕목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이 시대의 탓도 있다. 그가 요순시절에 태어났으면 아마 강태공과 벗하며 낚시로 여생을 보냈을지 모른다. 강력한 표백 세척제가 요긴한 것은 지독한 악취가 나는 것들을 씻어야 할 때인 것처럼 거의 모든 정치 지도자가 목전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주관을 감추고 말을 바꾸는 현재의 중우 정치와 세태가 그를 눈에 띄게 만든 것이다.

실익을 상관하지 않고 뱃심대로 말하는 그를 독불장군(maverick)이라 부른다. 그는 Obama를 미국인이 아닌 아랍인이라고 주장하는 지지자에게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남북전쟁의 고름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South Carolina의 유세에서 인종차별의 상처를 자극하는 동상들이 철거되어야 한다고 명백히 선언했다.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대중의 여론에 민감한 사안을 질문하는 언론인들은 대개 직선적 대답을 얻지 못한다. 보드카와 과일 쥬스 중 무엇을 선호하냐고 물으면 칵테일을 이야기하며 뭉개는 것이 정치 입문에 필요한 기량이다. 그러나 그는 솔직함을 지키기 위해 많은 표를 잃은 패자의 길을 택했다. 이것은 야구 선수가 직구만을 가지고 승부를 겨루면서 변화구를 던지지 못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은 스트라이크 존 자체를 옮겨 버리는 풍토에서도 정확히 한 중간에 던져 승부하는 명예로운 우둔함이다.

나 자신은 총기 규제에 관한 입장을 비롯해서 정치적 선호에서 그와 많이 다르다. 따라서 그의 구체적 정치적 행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병상에서 뛰쳐 나와 Obamacare의 표결에 참가하며 당파싸움의 종식을 외친 것이 기억나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가 병마와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심지어 치료를 포기했다는 발표가 나올 때까지도 그가 이처럼 빨리 타계할 것을 예상치 못한 탓인지 염려하는 정도에 그쳤고 한 사람의 용사(warrior)가 죽어간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서거가 발표되자 나 자신은 물론 미국의 조야가 순식간에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것은 의논이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 독립적 행위의 경합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해군의 4성 제독인 John McCain의 3대에 걸친 애국과 봉사, 그리고 그 정직한 고결성이 정치의 장에서는 그다지 유리하지도 유효하지도 않은 것이어서 그를 정치의 안목에서만 보는 세인의 주목에는 들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그것은 정치가 아닌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소재가 되어 버린다. 그의 강직함과 정당성이 마침내 사람들의 양심을 깨운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그처럼 살아야 한다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해 구멍난 자신들의 가슴을 기우고 있을 것이다. 집권자로서 챙길 모든 이익을 챙기다 측근들이 모두 수갑을 차는 궁지에 몰린 현재의 권력자도 허욕의 만리장성 속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철면피라도 지갑만 기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궁극적인 전장은 현세적인 돈, 권력, 명성이 아닌 인간성과 윤리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

Thomas Merton(1915-1968)은 미국의 카톨릭 수도자이자 작가, 신학자, 시인, 사회운동가였고 비교 종교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29년 사제로 서품 받았고 Father Louis로 명명되었다. 지금까지 Thomas Merton의 저서를 그저 서너권 읽어 보았고 그의 작품적, 정신적 세계를 간단히 조명한 글을 읽어 보았지만 읽을 수록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가 가톨릭의 Trappist 수도자로서 극도의 청빈과 침묵을 서약하고 수도생활을 하지만 결국 그의 작가적 재능이 교회의 요구에 의해 다량의 작품을 남기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운명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사람의 의도와 사람의 쓰임새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로서 최선의 것이다. 대개는 쓰임새 없는 사람이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기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이자 출세작인 Seven Story Mountain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부분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예술적 기질을 가진 젊은이가 부모를 잃고 고독에 시달리면서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시도를 해 보지만 결국 로마의 어느 성당 안에서 깨달음을 받는 순간이다. 절대자 앞에 수그린 사람들을 보는 그 순간이 인생을 정 반대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 성당 안의 사람들이 어떤 숭고한 종교적 이념이나 독실한 면모를 보였다기보다 창조주에게 절대적인 의지(依支)를 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삶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고 주(主)라고 불리우는 존재가 중심임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그의 책을 체계적으로 읽어 간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명상(meditation)을 돕기 위해 그것에 관한 그의 저서를 읽었고 노자와 장자를 읽던 중 그가 장자에 대해 저술한 책을 읽었다. 그는 젊은 시절 수도자가 되기전부터 사회 정의에 대해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저술 생활의 중심에 한동안 남았지만 점차 제도적 신앙에 대한 비판과 원시 기독교가 의미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구도의 자세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 후에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 동방정교회 등 타 종교에 대한 존경심과 깊은 이해를 통해 종교의 벽을 자유로 넘나들며 모순을 느끼지 보다 각 종교의  진리를 보는 혜안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종파를 넘는 행보가 그의 가톨릭 신앙을 위축시켰다기보다 완성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수 많은 저서가 던져 줄 감동을 예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바티칸 제2차 공의회가 시도하던 개혁과 맞는 것이며 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미국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가톨릭 인물로 꼽은 두 사람 중에 그가 들었다는 점에서 교회를 개방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열린 신앙의 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현재 가톨릭 교회의 지향과도 일치한다. 그는 이미 50년 전(1968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현재의 감각에서도 진보적인 철학을 가졌다. 오늘 아침 읽은 글에서도 그는 나에게 또 한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이것은 나의 명상과 작고 조용한 삶의 추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solitude(獨居)가 남들을 피해 숨는 것이 아니고 평소 대면하기를 꺼리는 자기 자신을 찾아 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무슨 대단한 금욕이나 희생처럼 생각하면서 시작하기보다 자신을 보고 싶은 마음의 절실함에서 시작하라고 한다. 이 글을 읽는 그 자체로 이미 상당히 그 일이 쉽게 느껴지는 것 같고 solitude에서 loneliness로 빠지지 않을 자신이 꽤나 생기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